서아롭게 평화로운
[감상] 안과 밖, 박준 본문
* 감상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 시
안과 밖, 박준
그 창에도 새벽 올까
볕 들까
잔기침 소리 새어 나올까
초저녁부터 밤이 된 것 같다며 또 웃을까
길게 내었다가 가뭇없이 구부리는 손 있을까
윗옷을 끌어 무릎까지 덮는 한기 있을까
불어낸 먼지들이 다시 일어 되돌아올까
찬술 마셨는데 얼굴은 뜨거워질까
점점 귀가 어두워지는 것 같을까
좋은 일들을 나쁜 일들로 잊을까
빛도 얼룩 같을까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 버릴까
그래서 나도 버릴까
그래도 앉혀두고 한 소리 하고 싶을까
삼키려던 침 뱉을까
바닥으로 겉을 훑을까
계수나무 잎은 더 동그랗게 보일까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
배를 문지르다가도 이내 아파서 발끝이 오므라들까
펼친 책은 그늘 같아지고
실눈만 떴다 감았다 할까
죄도 있을까
아니 잘못이라도 있을까
여전히 믿음 끝에 말들이 매달릴까
문득 내다보는 기대 있을까
내어다보면 밖은 있을까
* 감상
어두워지는 하늘이 보이는 창가에 서있을 때는 곧 바쁜 일상 속에 묻어두었던 질문이 고요함에 깨어나는 순간이죠. 창가에서 우두커니 서서 조용히 연이어지는 생각의 꼬리는 서로 연결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흐르는 의식을 묘사한 듯한 유독 넓은 행간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담겨있을지도 모릅니다. 스쳐지나가는 기억들이 그 행간을 가득 메우는 것일 수도 있고요.
시를 몇 번이나 더 곱씹은 저는 그 여백이 읽는 이가 자신의 삶을 투영하게 만드는 스크린으로 보였습니다. 감수성이 치밀어 오르는 밤과 하얀 스크린, 나 혼자만의 영화관에서 우리는 각자 영사기가 됩니다.
감성이 넘치는 시각에 떠오르는 지난 일은 대체로 후회와 아픔이 참 많습니다. 우울하기도 하죠. 어두운 감정의 원인은 주로 믿었던 혹은 친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난 후, 실수, 다툼 같은 일들일 것입니다. 쉽게 치유되지 않는 것들이지요. 그러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이 잊겠으나 밤이 되면 다시 살아나는 특징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 인상 깊은 구절들
윗옷을 끌어 무릎까지 덮는 한기 있을까 - 밤의 차가운 공기가 몸을 따라 무릎까지 내려오나 봅니다.
좋은 일들을 나쁜 일들로 잊을까 / 빛도 얼룩 같을까 - 좋은 일은 대개 희망찬 일, 밝고 쾌활하다 라는 느낌이고 나쁜 일은 대개 거무튀튀하고 어둡다는 느낌이죠. 좋은 일 = 빛, 나쁜 일 = 얼룩이라 한 듯 합니다.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 버릴까/그래서 나도 버릴까 ... 죄도 있을까/아니 잘못이라도 있을까 - 처음에는 화에 잠식 되어 모든 책임이 상대에게 있으리라 단단히 믿다가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지 않을까 되묻게 됩니다. 그 잘못이 무척이나 커보이기도 하지요. 생각을 고쳐서 작은 잘못이라 여기기도 하고요.
* 시 발췌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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